법관 화백 -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미학

김월수 | 기사입력 2020/08/25 [09:05]

법관 화백 -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미학

김월수 | 입력 : 2020/08/25 [09:05]

법관 스님은 서양화의 화법과 동양화의 화법 그리고 단청기법 등을 불교의 선(禪)사상으로 통합하여 사물을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구분하는 명철한 시각으로 삶을 성찰하고, 인간 실존에 대해 깊이 있게 자각할 수 있는 진공묘유의 미학으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열반과 법열)를 구현하고 완성한다.

 

▲ 난 68×34cm 화선지에 수묵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난(蘭)

 

칠성(七星) 김월수(金月洙) 

 

허공처럼

무심의 눈으로 바라다본다.

 

먹색이 물빛에 담겨 있다가 

현상의 껍질을 벗어놓고 

 

존재의 실체처럼

투명한 알몸으로 드러낸다.

 

바람의 숨결도 사라진 자리

덩그러니 우주의 춤

 

법관스님의 “난(蘭)”을 보고 쓴 시

 

2018년의 선화인 삼매 등의 수묵(수묵담채화) 작품을 살펴보면. 안정된 삼각형 구도로 먹의 번짐과 화두처럼 짧은 글귀 속으로 이끌려간다. 작가가 말하는 선(禪)이라는 삶의 자세를 그림 속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창작과정은 직관으로서 우리에게 온다. 선(禪)은 유(有)와 무(無)의 두 극단을 떠나 모든 사물의 실상(實相)을 깨닫는 진공(眞空)의 세계이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개념과 이미지, 생각과 감각의 균형과 조화로서 중도(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마조스님이 “그럼 모양 없는 법의 본성은 어떻게 볼 수가 있습니까?”라고 그랬더니 남악 선사가 (손가락을 세우며)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말처럼 작가는 선(禪)을 통해 마음을 찾고 그것을 그림으로 드러낸 것이다.

 

▲ 禪-2013 162.2×130.3cm 석채혼합재료에 캔버스 2012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禪-2013

 

칠성(七星) 김월수(金月洙) 

 

빛과 어둠으로 그려진 세상 

여백과 사물 사이

 

붉은 태양처럼 열정의 불꽃(+)

하얀 달처럼 냉정의 물꽃(‒)

 

고요한 태풍의 눈(0)

그 중심에 서서

 

일심(一心)과 같이

어린아이(마음의 눈)으로

 

새처럼 의식이라는 영혼의 촉을 세워 

담아낸 자연의 섭리처럼

  

법관스님의“禪-2013”을 보고 쓴 시

 

2013년의 단순화된 구상인 선(禪)-2013 등은 명상 속에서 바라본 듯 사물의 형상과 사물의 단순화 과정(simplification process)에서 전체와 부분의 경계로부터 반추하여 자신만의 시각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산수, 꽃, 난(蘭), 인물, 달항아리 등을  소재로 한 기하학적 추상인 선(禪)-2013 시리즈 중에서 신산수화 작품에서 편안함과 안정감 있는 삼등분구도, 새와 나무 그리고 꽃 등은 좌뇌(언어, 논리, 이성)와 우뇌(시각, 직관, 감성)의 조화 속에서 바라본 세상을 시각적으로 단순화된 언어와 직감적인 환희의 느낌으로 이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산, 물, 난(蘭), 풀, 나무, 바위와 같은 풍경과 인물 등을 점진적으로 변형과 단순화를 통해서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언어)를 구축한다. 작가는 분별하지 않거나 치우침이 없는 균형의 무심(無心)이며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의 세계다. 일심(一心)은 곧 나와 너를 떠난 동일·보편성으로서의 마음인 것이다.

 

▲ 禪-2013 90.9×60.6cm 석채혼합재료에 캔버스 2012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禪-2013

 

칠성(七星) 김월수(金月洙)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직관처럼 각성된 의식

 

변화하는 시간 지나서

모든 것 초월한 그 곳 

무한과 무(0) 사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피어난 중도의 꽃 

맺힌 열매와 함께

 

일체(一切)의 본질 안

그 실체라는 존재로부터

 

법관스님의“禪-2013”을 보고 쓴 시

 

禪- 2013 작품에서 직선과 곡선의 만남 등은 심리적 안정감과 시각적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제공하며, 추상성의 문양은 자연 속 사물을 단순화시킨 것으로 독특한 작가만의 조형관을 담고 있기도 하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은 직선과 꺾기 선, 그리고 원은 리듬을 울려주고 자연에 숨은 수학적 논리를 드러내 준다. 존재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 언어의 대상과 영역을 초월해 진리에 눈뜨게 하는 방법이다.  

 

▲ 禪-2013, 석채혼합재료에 캔버스 162.2x91.0cm 2012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禪-2013

 

칠성(七星) 김월수(金月洙) 

 

인연의 고리처럼 중첩된 타원

색과 형태의 진동

 

시간의 껍질 지나는 사이

춤추는 바람의 존재여라!

 

극미의 세계에서

파동은 존재의 그림자

 

소리처럼 아로새긴 생명의 결

자연의 원리와 패턴

 

법관스님의“禪-2013”을 보고 쓴 시

 

다른 禪-2013 작품에서는 상승 작용하는 수직 구도. 곡선 또는 타원의 소재로 하여 상하로 겹치고 중첩되면서 율동과 리듬감을 통해 절제된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마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여 동양철학은 외부의 거대 세계와 내부의 미시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고, 서양에선 합리적 이성의 중점을 두다가 양자물리학을 통해 극미의 양자 세계와 극대의 우주가 시공간을 통해 간섭하는 방식으로 엮여 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무한과 무라는 두 심연 사이에 존재한다.”라고 하였고, 베르그송은 <사유와 운동>에서 “삶과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직관을 사용하여 내적 경험에 대한 의미와 단서를 포착해야 하고, 이를 통해 삶과 생명에 멈추지 않고 흘러들어오고 있는 지속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아있는 생명은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으로 물질인 질료와 정신인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둘은 경향(현상·사상·형세 등이 한쪽으로 기울어짐. 또는 그런 방향)이지만 서로 섞이어 융화(녹아서 다른 물질로 변화)되어 있다. 형상은 질료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직관을 통해 형상이 이루려고 한 정신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삶과 생명, 세상의 시작인 시원(始原)을 만날 수 있다.

 

▲ 결 162×130 Acrylic on Canvas, 2018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칠성(七星) 김월수(金月洙) 

 

연기(緣起)의 세상

겹쳐진 가로세로의 선들과

불씨처럼 여백의 점들(空ㆍ圓ㆍ正)

 

순수하고 착한 동심(童心)으로 돌아갈 때

사물이라도 뚫어지게 바라보면 

 

유무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을 지나

공명과 울림처럼 존재의 이중성

 

침묵의 힘 같은 미세한 숨결로부터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十世)

 

공(空)의 진리처럼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 

 

법관 스님의 “결”을 보고 쓴 시

 

2015년경에는 순수 추상인 禪, 숨, 결 등을 아크릴 칼라로 캔버스에 작업해 가고 있는데, 작가의 조형방식은 절제된 구성으로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재해석해 표현하기도 하며, 비대칭적 기하학적 표현과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일정한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재료와 미술 사조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理)와 기(氣)처럼 직관으로 사물에 단순화를 시키다 보면 그 본질과 본성에 가까운 무의식적인 발현으로서, 존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면벽수도(面壁修道)하듯 막힌 벽이 열린 문(마음의 눈과 의식의 눈)으로 바라다본다. 일상의 여백은 빛나는 꿈이고 그리기 이전의 그림이다. 작품들은 밤하늘의 별빛과 먼 도시의 불빛처럼 무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선(禪)수행에서 오는‘긴 시간의 기록이며 그림은 곧 나요 나는 그림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지금의 마음이 작품에 오롯이 표현될 수 있도록 흩어진 생각은 모으고 오염된 마음은 순수하게 정화된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禪의 세계와 수행에서 얻어진 직관적인 깨달음을 조형 감각으로 풀어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2015년의 순수 추상 작품 ‘결’은 구성미를 강조할 때 쓰는 바둑판 구도이고, 소재로는 무위(無爲)처럼 자연스런 수평과 수직의 직선들(촘촘히 엮여진 그물망)이다. 수묵화와 석채나 분채를 사용하는 동양화가에게 또 하나의 좋은 재료가 있다면 물을 사용하는 아크릴 물감(수채화의 투명한 윤기와 유화의 강렬함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유화물감보다 열이나 그 외에 작품을 손상하는 요소들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이런 장점 때문에 아크릴 물감은 1960년대에 상업적으로 개발된 이후 미술가들에게 널리 이용되고 있다.)이 매력적이다. 

 

하얀 캔버스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을 끊고 새벽녘 하늘의 색깔처럼 파랑색과 군청색이 섞어 선(線)과 선(禪) 사이 숨통을 열고 있다. 거시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형상과 질료(아리스토텔레스 Aristteles)의 실체는 그 너머 동녘의 새벽별처럼 펼쳐진 미시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직선(線)을 그으면서 완성해 간다. 겹쳐진 가로세로의 선들과 흰 여백의 점들(空ㆍ圓ㆍ正) 속에서 우주 만물은 인연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생겨나서 곧 없어지고 마는 것이므로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며, 유(有)에 대한 비유(非有)로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체(自體)ㆍ실체ㆍ아(我)가 없다는 것이다. 무(無) 또는 허무와는 그 의미가 다른 실상(實相)의 의미이다.

 

원시불교에서는 모든 개체적 존재의 실체가 공(空)하다는 의미에서 연기(緣起)의 원리가 성립되었는데 의미적으로 보면 연기와 공의 원리는 상통한다. 여기서 현상이 공함을 파악하고 공의 세계로 몰입한 뒤 거기에는 중도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을 공하게 비울 때 그곳에 해탈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수행론을 근거로 한다. 현상계를 유전하는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의 화합으로 생멸하는 존재이므로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이와 같이 일체의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어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空)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의 세계를 말한다.

 

진공모유(眞空妙有)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거시세계에서 볼 수 없는, 거시적 관점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들이 미시세계(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에서 벌어진다는 것인데, 거시의 우주를 탐색하면서도 그 거시적 우주의 궁극에 이르면 시공을 초월하는(시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과 마주할 수밖에 없고, 미시의 세계를 탐색하면서도 그 미시세계의 궁극에 이르면 그 역시 동일하게 시공을 초월하는(시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을 접하게 된다. 

 

우리는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함께하고는 있으나 미시세계는 인식할 수 없고 거시세계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하고 기억되는 것이 무의식에 저장될 때 거시세계의 것만 저장됨으로 거시세계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양자현상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굳어져 있는 고정된 관념(개념)으로 가득 찬 무의식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깨달음이라는 마음의 눈(지혜)으로 보고, 직관적인 느낌으로 훤히 꿰뚫어 알기 때문이다.

 

애리조나대학의 의식 연구소장인 스튜어트 해머오프(Stuart Hameroff) 박사는  “이 우주는 아주 이상하다. 두 개의 법칙이 우주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백 년 동안 운동의 법칙을 설명한 뉴턴의 법칙이 적용되는 일상의 삶(거시세계). 하지만 원자처럼 아주 작은 단위로 내려가게 되면 또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 이것이 바로 양자의 법칙이다(미시세계).”라고 말한다.

 

거시의 세계는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된 상보적인 관계가 모여 한시적인 존재로 형상(모양)이 겉으로 드러난 세상이고, 미시의 세계는 거시세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사건), 또는 허공과 같이 형상이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느낄 수 없는 세상이다. 

 

미시의 세계는 소립자의 세계이므로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 고차원의 세계로서 수학적으로는 설명되지만 현상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이며 공(空)의 세계(진여의 작용)이다. 즉, 세간(世間)과 함께하고는 있으나 현상을 떠난 출세간(出世間)이다. 따라서 거시세계의 본질(근원, 근본, 뿌리)은 미시세계이다. 거시세계에서는 생멸이 있고 분별과 차별이 있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생멸이 없고 어떠한 분별도 차별도 본래 없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 것이지만,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분명이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모든 예술가들은 주관적인 아름다움에서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깨달아 가고 있다.

 

결론적으로는 법관스님은 물리적 시공간의 현상계 안에 갇혀있는 존재로 영원히 접근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나 선(禪)을 통해 무중력과 같이 상상의 날개로 현상적인 거시세계를 꿰뚫고 본질과 본성에 가까운 미시세계(진공묘유의 미학으로 열반과 같은)를 드러내고 있으며, 영원한 무시무종의 세계를 구현하고 완성한다.

 

2020. 08. 25. 미술평론 김월수(화가·시인)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이게 숲세권 아파트”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