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세계를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풀어내는 법관 화백(3)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20/08/20 [09:36]

선(禪)의 세계를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풀어내는 법관 화백(3)

최병국 기자 | 입력 : 2020/08/20 [09:36]

법관스님(이하 ‘법관 화백’)은 매우 특이한 존재다.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의 번뇌와 오온(五蘊)의 고통이 지배하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탈속, 불가에 귀의하여 40여년의 세월동안 수행 정진하는 선승(禪僧)으로서, 36년 성상에 걸쳐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범상치 않은 예인(藝人)이다. 우주의 원리를 자신의 물성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법관화백의 예술세계를 조명해 본다. 

 

색면 추상시대(2002〜2009) 넘어 선(禪)예술 시대 전개(2010〜 )

 

법관 화백 예술세계 조명시리즈(2)에서 선화(수묵담채)·유화 등을 통해 본 법관 예술의 여정(1992〜1995)과, ‘心象心流(2006) · 非山非水(2007)’ 展을 통해 색면 추상시대를 개막한 경위 등과 색면 추상회화의 특징 등을 살펴보았다. 특히, 색면 추상회화시대를 전개하면서 용솟음치는 독창력으로 화려한 원색의 한국미를 구현하여 광활한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 하루 평균 14〜15시간에 걸쳐 작업에 매진함으로서, 예술의 연금술사로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수많은 색면 추상회화를 창작했다. 법관예술의 전성기 개막이 예고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성적 작가인 법관 화백은 안주를 거부했다. 지칠 줄 모르는 예술의 투혼은 색면 추상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우주의 본질에 육박하려는 근원의 예술을 향하여 격렬하게 몸부림치면서 명실상부한 선(禪)예술 시대를 개막시킨다.

 

색면 추상시대를 넘어가며 선(禪)예술시대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창작된 수많은 작품들을 일일이 소개·평석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소수의 주요 작품들을 임의 선정하여 게재함을 우선 밝혀둔다. 또한 ‘선(禪)예술시대’ 명칭사용의 적절성에 대해 고심하였으나 작가인 법관 화백이 2010년부터 전시명을 ‘선(禪)’으로 일관하였기에 이에 따름을 동시에 밝힌다. 

 

사실 ‘색면 추상시대’와 ‘선(禪)예술시대’에 걸쳐서 있는 수많은 원색의 작품들은 현란함을 넘어 그 자체만으로 광휘를 발하고 있으며, 더하여 원로한 선원의 미를 향한 대원일의 엄숙함마저 경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색면 추상시대’ 작품들의 특장과 예술사적 의의 등 대해선 법관 화백 예술세계 조명시리즈(2)에서 개괄적으로나마 설명하였기에 본장(3)에선 작품소개와 간략한 설명으로 가름하고자 한다.

 

▲ (위왼쪽) 그림1) ‘무제’ 석채·혼합재료. 90.9×60.6cm(가로×세로). 2012년 / (위 오른쪽) 그림2) ‘무제’ 석채·혼합재료. 162.2×130.3cm(가로×세로). 2012년 / (아래) 그림3) ‘선(禪)’ 석채·혼합재료. 390.9×162.2(가로×세로). 2012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우선 그림1)의 2012년 작 무제(禪)는 축약과 중용의 미가 절묘하게 표현된 전환기 작품으로서 법관 예술이 나아가는 방향을 함축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휘영청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움직임이 멈춰진 고요를 촉각으로 더듬으면서 명상과 운율 및 시상이 절로 떠오르게 하고 있는 걸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림2)의  2012년 작 무제(禪) 역시 현란함을 넘어 푸른 바람의 욕망까지 일어나고 있는 광휘를 발휘하고 있는 전환기의 걸작이다. 세포분열처럼 증식되어가는 선 사이를 면이 채우면서 영원의 파도를 연상케 하고 있다. 또한 선(線)들의 화음 속에 소리와 빛깔들이 물결 아래로 침전되어가는 아스람 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더하여 휘도는 바람의 숨결과 함께 영원으로의 회귀를 위한 울림과 설렘마저  오롯이 피어나고 있다.

 

그림3)의  2012년 작 무제(禪) 역시 현란함을 넘어 붉은 피안의 세계를 갈망하는 바람의 욕망까지 오롯이 피어나게 하는 광휘를 발휘하는 작품이다. 특히 행태들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닥쳐올 근원의 작품을 예고하는 풍향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마치 꿈속에서 환생(還生)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신묘함마저 느껴지게 하면서 무극(영원)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빛의 층으로 점철된 시간을 넘어 영원을 갈망하는 환생의 꽃밭으로 이끌어 가면서 환생의 환희와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왼쪽부터) 그림4) ‘선(禪)’ 석채·혼합재료. 38×45.5cm(가로×세로). 2012년 / 그림5) ‘선(禪)’ 석채·혼합재료. 80.5×116cm(가로×세로). 2013년 / 그림6) ‘선(禪)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가로×세로). 2016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그림4)의 ‘선(禪)2012’ 작품은 대상의 형상이 완전히 지워지면서 청색바탕 위에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파편(점)으로 이루어진 절대추상 작품이다. 색면추상 내지 반추상을 뛰어넘어 궁극(우주)에 도달하려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 발현되어진 작품으로서 법관 예술의 지향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법관 예술이 뜨거운 추상(칸딘스키)을 넘어서 차가운 추상(몬드리안)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원의 예술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러한 작품세계 전환기에 법관 화백은 “그림은 나를 찾아가는 또 다른 수행이며 한 걸음씩 내딛는 내 모습입니다. 담는 것 모두가 진실이 되기에 더욱 조심스럽습니다(‘선-2011’ 전시회 인사말)”라면서, 남다른 각오를 피력했다.

  

자유롭고 다이내믹한 뜨거운 추상(칸딘스키)을 넘어 수평과 수직의 순수추상을 강조하는 차가운 추상(몬드리안)으로 진입은 법관 예술의 조형적 구축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과 면, 채색이라는 단순 조형체계로 무엇이 되려는 의지와는 무관한 무의식의 흐름이 만들어낸 강렬하고 청청한 선(禪)예술세계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표징(標徵)하는 것이다.

 

무심(無心)은 선(線)으로 스며들어가 선(禪)으로 탄생되는 법관의 추상예술

 

운명의 필연적인 흐름에 따라 법관 예술은 2010년 독일의 아트칼스루헤 초대전을 기점으로 절대추상의 차가운 추상으로 전환된다. 작품 또한 일루전(환상·幻想) 등을 배제하고 우주의 원리탐구와 운행질서를 밝혀내기 위한 무극(근원)의 예술세계를 추구한다. 자신의 예술들이 오랜 비바람 속에서 견뎌내면서 영생의 꽃을 피우는 무한의 열매처럼 더욱 영글어 가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이러한 상황 등과 관련하여 법관 화백은,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균형적인 아름다움과 변화된 자유로움의 조화, 그리고 고졸하면서 내적으로 힘을 담아낸 부드러운 선, 여백으로 드러낸 여유로운 禪의 세계와 수행에서 얻어진 정신세계를 현대적 조형 감각으로 풀어내기 위한 작업을 하려고 노력 합니다(작가메모6)”라면서 균형감각 속에 통로를 열어가는 (열린)예술론을 강조하기도 했다. 

 

색면 추상회화의 환영(幻影)을 지워가며 근원의 예술을 추구하면서 순수(절대) 추상회화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이는 법관의 예술세계에 대해 고연수 미술평론가는 “있지 않고 없는 것 그것조차 분별하지 않는 마음, 즉 치우침이 없는 균형의 무심(無心)은 선(線)으로 스며들어가 선(禪)으로 또한 나온다”면서, “작업과 하나가 된 작가 법관의 행위는 자유롭고 가장 최상의 평온함과 숨으로 에너지를 담고 우리에게 스미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윤진섭 평론가는 “선(禪) 수행의 방편으로의 그림 그리기란 그리는 행위 이외에는 일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정신과 행위가 일치할 때 마음의 지고지순함이 화면에 배어든다. 아크릴 컬러와 동양화 물감, 그리고 석채가 혼합돼 이루어내는 순도 높은 그림의 색가(色價)는 맑은 정신성을 듬뿍 머금고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어쨌든 법관 화백의 예술세계는 자연과 생명의 빛을 향한 갈망의 숨결로서 묵언수행을 통해 영근 작가의 속살이다. 법관 화백의 순결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켜켜이 스며있는 투명하고 밀도 높은 작품들 속에 우주의 운행원리가 숨겨져 있다. 그 원리는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각각 다르게 사유될 수 있다. 법관 작품을 풀어내는 비밀의 열쇠는 여기에 있다. 무심(無心)은 선(線)으로 스며들어가 선(禪)으로 탄생되는 법관의 예술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열린 예술이다. 

 

법관 화백은 “나의 작품들이 푸른 바람이 되거나 부드러운 햇살 또는 흰 구름이 되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통로를 열어주는 열린 예술이 되기를 희망한다”면서, 예술의 여정에 동행을 갈망했다. 영원을 갈망하는 법관의 순수추상예술을 살펴본다.

 

법관 화백의 순수(절대) 추상작품 창작은 선화·유화도입기(제1기) 및 색면 추상시대(제2기)를 거쳐 현재 진행(제3기)상황이다. 순수추상시대 전개의 시대적 상황 및 작품특징들은 개괄적으로 설명하였기에, 여기서는 작품위주로 핵심사항만 논한다.

 

그림5)의 선(禪) 2013년 작품(석채·혼합재료)은 상단의 청색을 바탕으로 한 선(線)들의  화음과 하단의 진회색 계통의 색감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명상과 환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숨소리마저 멈추게 하고 있다. 순간과 영원을 함께 호흡하면서 멈춰진 시간 속에서 살며시 귀를 기울이면 창공의 바람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그림6)의 선(禪)2016년 작품(캔버스에 아크릴)은 배경조차 전혀 없는 붉은 색을 칠하고 또 덧칠한 원형작품으로서 법관 화백의 순수 추상작품의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명확해 보이기도 미묘해 보이기도 한 붉은 물에 푹 담가 적신 듯, 혹은 처음부터 바탕이었든 붉은 색들이 표면 위로 올라오는 듯하다.

 

▲ (왼쪽부터) 그림7) ‘선(禪)2017’ 캔버스에 아크릴. 91×116.2cm(가로×세로). 2017년 / 그림8) ‘선(禪)2017’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가로×세로). 2017년 / 그림9) ‘선(禪)2018’ 캔버스에 아크릴. 112×162cm(가로×세로). 2018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그림7)의 선(禪)2017년 작품(캔버스에 아크릴)은 마치 삼배에 검은색과 청색의 혼합물을 입힌 것 같은 촘촘함이 배어져 나오는 법관의 전형적인 순수 추상작품이다. 생과 사의 순환 고리가 머무르는 우주의 신비를 연상시키고 있으며, 생명의 불꽃을 태우다가 한줌의 먼지로 돌아 가야하는 피안을 연상케 한다.

 

그림8)의 선(禪)2017년 작품(캔버스에 아크릴)은 청색바탕에 마치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그려진 두개의 그림이 병존하는 특이 작품이다. 또한 화면을 완전히 칠하고 않고 적절히 비워두는 여백의 미학이 실현되었다. 꿈틀대는 점과 선들은 그들끼리 마찰 없이, 서로 엉키거나 뭉침 없이 조화롭게 위치해 있다.

 

그림9)의 선(禪)2018년 작품(캔버스에 아크릴)은 두 개의 알 수 없는 물체가 확산을 거듭하는 듯한 신비스런 작품이다. 보일 듯 말 듯 한 질감으로 어우러진 화폭 속에 끊이지 않는 선과 그 속에 담겨지는 점들이 향연하고 있다. 스케치 없이 단숨에 하지만 지속적으로 꾸준히 그저 찍는 과정에서 탄생된 걸작이다.

 

▲ (위 왼쪽) 그림10) ‘선(禪)2018’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가로×세로). 2018년 / (위 오른쪽) 그림11) ‘선(禪)2019’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가로×세로). 2019년 / (아래) 그림12) ‘선(禪)2020’ 캔버스에 아크릴. 162×90cm(가로×세로). 2020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그림10)의 선(禪)2018년 작품(캔버스에 아크릴)은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형상들이 어우러져 신비를 창출하고 있는 걸작이다. 이 작품전(2018)까지 주로 화폭에 칠하고 또 칠하면서 수행과 명상을 표현했는데, 이 작품은 기존의 패턴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다. 맑고 깨끗이 정화된 영혼의 우물을 길어 퍼 올리는 것과 같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붓끝을 옮기는 작가의 영혼이 느껴진다.

 

그림11)의 선(禪)2019년 작품(캔버스에 아크릴)은 삼배에 진한 청색과 연한 청색 물감을 입힌 듯한 작품으로 구도를 행하듯 무수히 반복되는 붓질을 통해 저절로 탄생된 작품이다. 이는 또 법관 화백의 순수 추상회화의 특장이기도 하다. 탈속한 듯 보이는 청색의 섬세한 변화와 진청의 중간부분이 눈길을 끈다.

 

그림12)의 선(禪)2020년 작품(캔버스에 아크릴)은 무명천에 검정색 물감을 곱게 입혔으나 완전히 스며들지 않는 상태를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상단 여백의 미가 눈길을 주고 있다. 생(生)의 껍질 속에 남겨져 있는 한줌의 숨결을 느끼게 하며,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하는 피안의 다리를 연상케 한다. 최근작으로 법관 작품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를 향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계속)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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