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⑰

[제3기] 일제강점기(1910~1945년) 일제 강점기 전화 값 폭등 과 전화 브로커

이세훈 | 기사입력 2020/05/14 [13:54]

[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⑰

[제3기] 일제강점기(1910~1945년) 일제 강점기 전화 값 폭등 과 전화 브로커

이세훈 | 입력 : 2020/05/14 [13:54]

[제3기] 일제강점기(1910~1945년) 일제 강점기 전화 값 폭등 과 전화 브로커 

 

일제강점기 전화는 특권의 대상이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화를 가입하기 위해선 지급전화 신청서를 제출하면 체신국에서 매년 설정한 지급전화 가입신청 순번에 의해 전화를 가설해 주었다. 순번이 늦어져 전화가설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전화선의 가설 등의 일체비용을 가입자가 직접 부담하면 가설해 주는 ‘특설전화’ 제도가 있었다. 전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은 비용을 들이면 전화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6년 이후 특설전화 제도는 잠시 중지된다. 체신 예산과 전화기 생산 등의 문제로 전화가설이 늦어져 수요와 공급에 불균형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1919년 경성지역의 전화가설은 신청자 수 700명중에서 150여명에만 전화가설이 되었다. 따라서 전화 수요는 갈수록 증가하여 특설전화를 허용하게 된다.

 

특히 1920년대에 들어 상점가의 전화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1920년 2월 ‘전화규칙의 개정’을 통해 전화 가입권을 공개추첨 방식으로 한다. 공개추첨은 상업회의소와 신문기자, 경찰 그리고 다수 신청자가 입회하여 진행한다. 당시 전화 1대의 가격이 1000원 이상이었던 탓에 투기 목적으로 전화가설 신청이 7000여명 이상에 육박한다. 전화매매를 목적으로 전화가설을 신청하는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불황으로 인해 1924년 한 해 동안 명의변경이 3,423건으로 전년도에 비해 약 1,200건이 증가한다. 불황으로 전화가설 신청 수도 줄어들고 전화매매가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1925년 체신국에서도 신규가설을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는 한편 추첨에 의하지 않고 신청이 들어오는 대로 모두 가설해 주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전화가격을 통해 경기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전화가격의 변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 일제강점기 전화기 (좌로부터) 벽괘형 자석식전화기, 갑호탁상형 자석식전화기, 벽괘형 공전식전화기, 벽괘형 자동식전화기

 

1930년대 중반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자 다시금 투기 목적에서 전화가설 추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1934년 경성의 전화가설 신청180명 모집에 1,300여명 신청으로 전화를 영리목적으로 신청한 사람들이 많았다. 1934년 이후 부터는 군수품 경기로 인하여 전화수요가 증가한다. 전화가격이 가설비, 가입비 등을 합한 것보다 2~4배에 달하자 중간에 전화 브로커 까지 생긴다. 경성 같은 곳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화 1대에 1,500원을 주고 살 수 밖에 없었다.

 

1936년에 전화가설 신청이 과열양상을 보인다. 전국 신청접수는 전년도 8,200여 건에 비교하여 2만 3천여 건으로 격증한다. 전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충족시키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한편 1937년 추첨에 참여하는 비용 150원을 미리 납부하는 ‘가설비 가납제도’를 신설한다. 전화투기 현상에 대처하고자 당첨자 수를 늘린 조치는 신청자 수가 전년도의 절반 수준으로 격감해 어느 정도 효과를 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긴급통신 등 중요통신이 격증한다. 제반물가의 인상 등으로 전신전화 시설확충이 곤란하게 된다. 1939년도 전화가설수의 감소로 전화가격 상승이 예상되자 전화매매업의 개인 사업을 금지하는 ‘전화업자 공인제’를 도입한다. 경성의 전화시세는 기존의 1,000원에서 급등하여 1,500원을 호가한다. 당시 노동자 월평균 수입이 40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또한 전화추첨에 당첨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자 경성에서만 하더라도 전화가설 신청에 6,301명이 참여한다. 이중에서 조선인이 3,791명으로 ‘전화광시대’가 연출된다.

 

1940년에 전화시세가 3,000원을 바라보게 되자 전화의 명의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전화를 담보로 고리대금도 하고, 돈 급한 사람에게서 헐값으로 사서 매매를 하던 전화 브로커 에게는 다소간 숨통이 트이게 된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후인 1942년엔 전화 1대의 가격이 3,000원 이상까지 치솟았다. 1941년에 들어 전화가설에 있어서도 시국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 군사국방, 생산력확충, 수출무역진흥, 국민생활 확보에만 인가해주고 그 외는 가설해주지 않았다. 1942년부터는 ‘전화총동원계획’이 수립되어 사용하지 않는 전화(유한전화)를 필요한 사람에게 적당한 시세로 내어주도록 했다.

 

이세훈 

KT 시니어 컨설턴트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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