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입니다” ①

쌍용차 노동자들의 시간여행

성상영 기자 | 기사입력 2020/01/22 [17:40]

[인터뷰]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입니다” ①

쌍용차 노동자들의 시간여행

성상영 기자 | 입력 : 2020/01/22 [17:40]

누군가는 소박한 꿈을 안고, 또 누군가는 그저 자동차가 좋아서 들어왔다. ‘무쏘체어맨’, ‘이스타나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차들이 내 손을 거쳐 갔다. 매일 밤낮으로 잔업과 특근을 하며 자재를 나르고 볼트를 죄었다. 회사가 뜨고 가라앉기를 반복했지만, 나는 묵묵히 삶의 터전을 지켜왔다.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다.

 

2009, 10년 만의 공황이 기승을 부릴 때 쌍용차는 무려 2646명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전 직원의 3분의 1이 넘게 구조조정명단에 올랐다. 수백 명의 노동자는 77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고 저항했지만, 공권력에 무너졌다. 중국의 먹튀기업 상해기차와 무능한 정부, 경영진이 초래한 비극의 서막이다.

 

그로부터 107개월. 그동안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서른 명 넘게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졸지에 직장을 잃고 빚에 짓눌린 해고 노동자들은 안 해본 일이 없다. 생계를 위해서도, 그리고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명분을 위해서도.

 

▲ (왼쪽부터)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앞에 선 노동자 박승순·조문경 씨.  © 성상영 기자

 

몇 년 후 해고 노동자들은 작은 기대를 품게 됐다. 인도의 마힌드라로 인수된 쌍용차는 2013년부터 2018년까지 582명의 무급휴직자를 부서 배치했다. 2015티볼리의 성공에 힘입어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와 소위 기업노조로 불리는 쌍용자동차노동조합, 그리고 회사까지 3자가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다. 2018년 이번엔 정부 측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까지 더해 ···합의가 성사됐다.

 

합의대로라면 마지막 남은 46명이 올해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이들은 지난해 상반기에 6개월간 무급휴직을 조건으로 채용됐다. 그러나 성탄 전야에 회사는 경영 상황이 어려워 통상임금의 70%를 지급하는 유급휴직으로 전환하고, 부서 배치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지금은 누가 불러주지는 않았어도 출근을 하고 있다. 어느 노동자는 부서 배치 무기한 연기가 2009년 정리해고보다 더 큰 충격이라고 털어놨다. 46명이 출근을 감행한 이유다. 이들이 출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합의의 온전한 이행을 요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근길에 오른 지 보름여. 쌍용차 노동자들과 짧게나마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가슴 설레던 첫 출근의 순간부터 아마도 라인을 타고 있을가까운 미래까지 주마등을 켰다. 2009년만큼은 잠시 건너뛰고 싶었다.

 

▲ 쌍용자동차 노동자 조문경(58) 씨.  © 성상영 기자

 

▲ 쌍용자동차 노동자 박승순(49) 씨.  © 성상영 기자

 

▲ 쌍용자동차 노동자 김상민(46) 씨.  © 성상영 기자

 

이 정도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지

 

1994년 쌍용차에 입사한 조문경(58) 씨는 품질관리 부서로 첫 출근을 했다. 자동차 정비사였던 그는 쌍용차에서 전국 순회서비스 요원을 뽑는 시험에 지원했다가 한 차례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 생산직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모델마다 사양표에 따라 잘 만들어졌는지 검사하는 일이었다.

 

선임들이 파일철을 주면서 외우라고 하더라고요. 수출과 내수가 달라요. 그 사양을 다 외우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탈모도 왔었어요. 이 정도 공부했으면 서울대도 갔을 거라고 할 정도로.” (조문경 씨)

 

박승순(49) 씨는 1995년 쌍용차에 입사했다. 승순 씨는 지인의 추천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자동차 조립에 필요한 각종 자재를 생산 라인에 공급하는 일이었다. 앞서 조문경 씨처럼 천 가지가 넘는 볼트의 품번(품목 번호)을 꿰고 있어야 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어려운 건 없었는데, 각 라인에 볼트만 천 몇 가지가 들어가니까 어느 공정에서 쓰고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를 다 알아야 불출량(지급량)을 조절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다 갖다 줘야 하는 시스템이다 보니까 그걸 숙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죠.” (박승순 씨)

 

인터뷰에 함께한 이들 중 막내인 김상민(46) 씨는 2001년 쌍용차에 입사했다. 어릴 때부터 공업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에게 자동차 공장은 워너비같은 것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앞날을 꿈꾸기 위해 상민 씨는 쌍용차에 입사를 지원했다.

 

어렸을 때부터 전자제품 같은 거 뜯고 조립하는 걸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땐 용접을 하다가 컴퓨터를 좋아해서 20대 땐 컴퓨터 기사도 했어요. 차 구조가 궁금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걸 해보자고 해서 정비 자격증을 따서 입사하게 됐습니다. 자동차 쪽으로 오면 저 자신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요. 크게 욕심은 없어요. 앞날을 꿈꾸기 위해서.” (김상민 씨)

 

▲ (왼쪽부터)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앞에 선 노동자 조문경·김상민·박승순 씨.  © 성상영 기자

 

첫 월급의 기억

 

정신없이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직장인이라면 그 무엇보다 기다리게 되는 첫 월급을 손에 쥐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쓸모가 많았다. 액수야 얼마가 됐든 기분도 내보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직장인에게 첫 월급명세서는 또 다른 세계의 문으로 들어가는 통행권 같은 것이다.

 

그때는 기본이었던 것 같아요. 다 부모님 갖다 드리고. 20대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집에다 드렸던 기억. 아무래도 좋아하시죠. 얼마 안 되는 돈이었어요. 40만원인가? 수습 기간이라고 해서 월급도 적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부모님들은 고생했다고 하시죠.” (박승순 씨)

 

제가 술을 좋아해서요. 부모님 계신 곳이 전라도 벌교였는데 (월급을)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한테 술을 사기도 하고, 30대니까 많이 마셨죠. 부서 자체가 회식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수습 땐 항상 부족했던 것 같아요.” (조문경 씨)

 

되게 벅찼어요. ‘내가 자동차 조립을 해서 돈을 받았구나.’ 어머님께 반쯤 드렸는데 안 받으시려고 했어요. 당시 50만원 정도. 나머지는 친구들한테 쏜 거죠. 기쁜 마음에 제가 자동차 만들어서 월급 탔다. 그런 기억이 납니다. 자랑도 하고 싶었어요.” (김상민 씨)

 

그때 부모님께 드리지 못했다라던 문경 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는 첫 직장이 쌍용차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첫 직장에서는 풍습대로 부모님 속옷 선물을 해드렸죠. 급하게 만회하려는 건 아니고요(웃음).” (조문경 씨)

 

▲ 부서 배치를 기다리고 있는 쌍용자동차 유급휴직 노동자들이 회사의 2018년 노·노·사·정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지난 21일 오후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집중 문화제’를 열고 있다.  ©성상영 기자

 

자부심과 희망, 한편으로는 불안했던

 

대공장 노동자라는 것, 더구나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타 라인보다 더디게 가는 시계를 바라보는 따분함을 이겨내고 공장 밖을 나서면 내가 만든 차가 쌩쌩 달리는 모습을 보는 기분을 퍼뜩 이해할 수는 없다. 현대·기아·대우·쌍용, 그중에서도 쌍용차 노동자라서 느낀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지 생각해 봤다.

 

추억이지만, 좀 서글퍼지네요. 20대였고 결혼을 안 한 상태였는데 앞날을 준비할 수 있고, 오래 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곳이 여기가 처음이었거든요. ‘회사가 크구나, 안정됐구나하면서. 벅찼던 건 제가 원하던 조립을 할 수 있고, 형이나 동생들에게 가정사도 얘기하면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였어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2009년도에 첫애를 낳고 결혼도 했어요.” (김상민 씨)

 

체어맨 라인에 들어갔는데, 당시 대한민국 1%’라는 슬로건이 있었죠. 그때 손명원 사장이었을 거예요. ‘입고 있는 양복바지가 얼맙니까물으니까 200만원이라 하더라고요. 그 정도 레벨의 시트가 있어야 하고 상당히 고급스럽게 만든 차였죠. 김종필 자민련 총재, 김영삼 대통령, 이종찬 안기부장, 노무현 대통령, 우리나라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왔을 때도 체어맨을 탔어요. 제가 만진 차가 그 사람들에게 갔을 때 자부심이 있었죠.” (조문경 씨)

 

그러나 불안감도 있었다. 쌍용차는 동아자동차에서 쌍용그룹으로, 대우그룹으로, 다시 상해기차로 주인이 숱하게 바뀌었다. 회사가 작게라도 부침을 겪으면 노동자들이 받는 고통이 때로는 더 클 때도 있다.

 

제가 입사했을 땐 쌍용자동차로 바뀐 지 얼마 안 됐을 때고, 좀 다닐 만해져서 대우자동차로 넘어갔죠. 어느 정도 잘 되나 했을 때 상하이로 넘어가고, 먹튀를 당하고 구조조정을 당했어요. 몇 년 주기마다 계속 겪었던 거예요. 맨날 불안해하면서 가슴 벅차다 싶으면 불안해지고, 안정됐다 싶으면 이런 식으로 터지니까 걱정하는 것 많고 실망하는 것도 많았어요.” (박승순 씨)

 

▲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가 지난 21일 오후 경기 평택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개최한 ‘집중 문화제’ 참석자가 촛불을 들고 있다.  ©성상영 기자

 

모든 기억을 삼켜 버린 2009

 

기업은 돈을 좇는 곳이다. 그런데 회사라는 조직도 결국 사람이 여럿 모인 곳이어서 여러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곤 한다. 화나는 일이나 슬픈 일은 동료들과 담배 한 개비, 소주 한 잔으로 털어버리고 기쁜 일에는 폭탄주를 말아 나눈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술버릇을 들키고 마는 게 직장 생활이다.

 

우리의 시간여행에서 2009년은 들리지 않기로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2009년은 너무 아프고 무겁게 노동자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회사에 다니며 특별한 순간,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결국 그것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2009년도에 정말 친하게 지냈던 선후배 사이를 해고자와 해고자가 아닌 사람으로 분리를 해서 이쪽을 살아야 한다투쟁하고 저쪽은 빨리 나가라고 싸우게 한. 그렇게 만들었던 사회나 제가 해고를 당했다는 부당함까지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의도 많이 들었고, 이게 세상인가 싶었어요.” (박승순 씨)

 

갑자기 앞이 좀 가리네요. 가끔 (신차) 테스트 드라이브를 나갔는데 동료가 사고로 죽었을 때, 또 다른 동료가 회식이 끝나고 대리운전을 불러서 가다가 사고로 죽은 일.

 

그런 아픔은 잠시 그때였는데 2009년 회사에서 쫓겨나서 너무 힘들었어요. 한 번은 마누라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여보, 진짜 미안한데 내가 가정을 지키겠다고 장담을 못 하겠네. 이혼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내가 먼저 해줄게. 어떻게 생각해?’ 2009년 옥쇄파업 때 구속이 됐어요. 그냥도 아니고 (경찰한테) 정말로 많이 맞고 들어갔거든요. 이 고통보다 차라리 잡히는 게 마음이 편할 정도로. 삶이라는 게 일단은 돈이라서 일자리를 알아보니까 받아준다는 데도 없데요.” (조문경 씨)

 

특별한 순간은2009년도에 사태가 날지는 몰랐지만, 제가 속도위반을 했어요. 결혼하기 전에 첫애가 생겼는데, 그때가 가장 특별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에 그 일이 있어서.” (김상민 씨)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문화저널21 성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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