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복싱스토리] 한국체대 유종만교수의 퇴임에 즈음하여

조영섭 기자 | 기사입력 2019/09/09 [11:12]

[조영섭의 복싱스토리] 한국체대 유종만교수의 퇴임에 즈음하여

조영섭 기자 | 입력 : 2019/09/09 [11:12]

며칠 전 한국체대 유종만 교수가 성내동에 위치한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하여 그의 고향후배인 안상우가 운영하는 인근의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80년 10월, 한국체육대학교 복싱부 조교로 시작된 그의 공직생활이 어느덧 40년에 달하는 세월이 흘러 김동길, 진행범, 허영모, 안영수, 이재혁, 이해정, 송경섭, 김원일 등 스타복서들과 함께  한 세대를 풍미했던 그가 떠난다니 축하와 아쉬움이 교차된다.  

 

필자가 유 교수를 처음 접한 것은 지금부터 36년 전인 83년 로마 월드컵 대표 선발전 때 였다. 당시 라이트플라이급 성광배, 플라이급 박권순, 미들급 하종호 등의 선수들과 함께 참가한 유교수는 만29세의 3년차 조교 신분이었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한국체대 교수에서 퇴임하는 유종만의 라이프스토리를 펼쳐본다.  

 

▲ 탄다타 안상우대표와 유종만교수(우) (사진=조영섭 기자) 


54년 8월 전북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에서 철도공무원인 부친 유재환 옹의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난 유종만은 선천적으로 스포츠에 만능이었다. 특히 축구실력은 그가 후에 태릉선수촌에서 레슬링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펼칠 당시 축구 국가대표 함흥철 감독이 인정할 만큼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이런 기초체력이 탄탄한 그가 68년 중1때 이리체육관(관장 조석인)에 복싱을 배우러 입문해 69년 호남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기틀을 다진 후, 71년 남성고에 진학해 꽃을 피운다. 그해 3월, 제2회 아시아 주니어 대회 (플라이급)와 6월 제22회 학생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전국선수권대회 마저 결승에 올라 당돌하게 성인무대까지 석권을 노린다. 비록 결승에서 68년 멕시코올림픽 은메달 리스트인 지용주(48년. 원주)에게 판정패해 3관왕이 좌절됐지만, 무한한 그의 포텐셜(potential)을 확인할 수 있는 대회였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72년 뮌헨올림픽 최종 선발전 결승에서 후에 동양챔피언에 등극하는 김영식(50년. 수경사)을 잡으며 돌풍을 일으킨다. 당시 대표팀 명단은 라이트플라이급 이석운, 플라이급 유종만, 밴텀급 고생근, 페더급 김성은, 라이트급 김태호, 라이트웰터급 박태식, 웰터급 김주석, 라이트미들급 임재근이었다.고교생의 올림픽출전은 유종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대회로 기억된다. 

 

올림픽 본선에서 탄자니아와 몽고 선수를 제압하고 8강에서 만난 복서는 폴란드의 유럽선수권자인 라세크 블라진스키였다. 바로 운명의 그날인 9월 6일, 새벽에 울린 총소리에 유종만은 잠을 깬다. 한국팀 숙소 맞은편에 있는 이스라엘팀 숙소에 총기로 무장한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인 일명 검은 9월단이 나타나 총격을 가해 이스라엘선수 2명이 피살되고 9명이 인질로 붙잡히는 성전(聖典)을 피로 물들이는 초유의 테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페더급 금메달리스 유종만과 김택수회장 (사진=조영섭 기자)

  

강대국이 약소국을 공격하면 작전이 되고 약소국이 강대국을 공격하면 테러가 되는 그런 국제사회의 법칙이 그대로 통용되는 역사적인 그날 유종만은 외출이 통제된 탓에 도시락으로 식사를 해결한 후 출전해 박빙의 승부 끝에 2:3으로 분패한다. 당시 단장으로 참가한 주상점(연세대) 선생은 호주심판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같은 동양인 끼리 그럴 수 있느냐’ 호통치며 항의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시 한국은 전 종목에 걸쳐 단1개의 금메달도 획득하지 못해 ‘국비로 해외여행 다녀왔다’는 자조 섞인 비난을 받은 반면, 미국의 마크 스피츠 는 수영에서 7관왕을 달성하는 경악할 기록을 세우면서 묘한 대조를 이뤘던 올림픽 대회였다.   

 

이듬해 밴텀급으로 출전, 73년 아시아선수권과 제3회 대통령배 대회에서 백종우(원주대)와 정대헌(진주체)을 결승에서 각각 RSC승과 판정승으로 누르고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된 유종만은 그해 54회 전국체전에 페더급으로 출전해 충북대표 이동기(54년, 세광고)를 잡고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다. 이동기는 후에 가수로 변신 1983년 ‘논개’를 빅히트시키며 가요계에서 활동했다.   

 

원광대에 입학한 74년, 유종만은 테헤란 아시안 게임 선발전 결승에서 이태익(중산체)을 잡고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멤버들은 라이트플라이급 박찬희, 플라이급 황철순, 밴텀급 김창석, 페더급 유종만, 라이트급 김태호, 라이트웰터급 박태식, 웰터급 김주석, 라이트미들급 장영실, 미들급 김성철 이었다.   

 

유종만은 준결승에서 후에 동양챔피언에 등극한 정순현(52년, 천안)을 상대로 방어전을 치렀던 윌리 루카스(필리핀)를 준결승에서 꺽고 결승에선 이란선수를 KO로 잡으며 박찬희, 김태호, 김주석, 김성철 등과함께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탄력을 받는 그는 그해 12월 아시아 올스타로 선발돼 미국 네바다주에서 북미선수들과 벌인 3연전에서 국내복서로는 유일하게 전승을 거둔다. 특히 2차전에서 맞붙은 미국대표인 마이크 헤스를 좌우연타로 두들기며 2회 RSC로 누른경기는 압권이었다. 

 

▲ 75년 3월 제7회 아시아선수권 1차선발전 결승에서 최충일을 제압하는 유종만(좌) (사진=조영섭 기자) 

 

유종만은 그해 대한아마복싱 최우수복서로 선정된다. 리드미컬한 풋워크에 의한 발칸포처럼 터지는 이펙티브 블로우(effective blow)로 무장한 유종만은 한마디로 난공불락(難攻不落) 그 자체였다. 그해 말 MBC가 선정한 10대 스포츠스타에 △조오련(수영) △차범근(축구) △허구연(야구) △박인실(배구) △조영순(농구) △백옥자(투포환) △홍수환(복싱) △원신희(역도) △정현숙(탁구) 등과 함께 선정돼 피날레를 장식한다.  

 

유종만이라는 폭주 기관차는 75년에도 질주를 멈출 줄 몰랐다. 제1회 킹스컵 대회 4강에서 프랑스 대표인 ‘아쿠아 비바’를, 결승에선 홈링의 ‘솜포치 시리클’을 예리한 카운터로 일방적으로 난타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린 그는 제7회 아시아선수권대회(요코하마)에서도 금메달을 획득, 국제대회 2관왕을 달성하며 탈(脫) 아시아권 복서로 거듭 태어난다. 일본팀은 후에 김철호가 보유한 WBC 수퍼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한 일본의 이시이 고우끼 가 한국의 박인태를 누르고 플라이급에서 우승하며, 일본팀에 유일한 금메달을 선물했다. 

 

이때 유종만에게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불청객이 찾아온다. 대회를 치르기전 라이트급 국가대표인 김일과 스파링에서 팔꿈치부상을 당한체 본선에 출전한 그는 설상가상 본선에서 손목부상까지 당한다. 그에게 마지막 복싱역사에서 화룡점정 의 대미를 장식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목전에 둔 유종만 에게도 이제 휴식을 통한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큰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안목의 전북체육회는 부상당한 그에게 전국체전 출전을 강요했고, 전국체전에 억지춘향으로 출전한 그는 첫판에서 백종우와 맞붙어 타격전을 벌이다가 손에 골절상을 입고만다. 낙심한 그는 올림픽출전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 정년을 앞둔 한국체대 유종만교수 (사진=조영섭 기자)  

  

그해 제13회 대한민국 체육상 시상식에서 문교부장관 표창장을 수상한 그는, 당시 김종필 총리가 수여한 장관 표장장과 40만원의 상금을 받았지만 얼굴은 석고처럼 굳어있었다. 당시 유종만에 대항했던 최충일을 비롯해 김성은, 이태동, 이태익, 백종우, 전학수, 정재룡, 김영식, 고영관, 조영진, 천흥배, 이상덕 등 국내 정상급 복서들이 유종만의 주먹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면서 국내외에서 기록적인 51연승을 창출한 그에게 먹구름이 몰려온 것이다.  

 

이듬해 1976년 1월 27일자 경향신문에 ‘복서 유종만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스포츠의 숙원인 금메달의 꿈을 실현 시켜줄 최고 유망주’라는 기사가 1면에 실릴 정도로 기대가 컸기에 그의 부상은 국가적인 손실일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그는 결국 그해 4월 페더급 최종결승에서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최충일(대우)에게 분패하며 몬트리올 올림픽호 승선(乘船)에 실패한다. ‘기회는 앉아있는 새와 같다. 날기 전에 잡아야 된다’고 옛 현인들이 말했지만 새색시처럼 슬그머니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기회를 놓친 그는 망연자실한 뿐이었다. 모두들 이제 유종만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 77년 아시아선수권 최우수 복서로 선정된 유종만 (사진=조영섭 기자)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분기탱천하며 재기의 칼날을 간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10대1의 열세를 단지 결사항전의 의지만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한 전략·전술 연구, 그리고 사전 준비를 통해 재기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듯이 유종만도 정교하고 치밀한 로드맵을 짜서 컴백을 준비한다.   

 

대학졸업반인 77년 5월 아시아선수권 선발전에서 황철순을 꺽고 국가대표(밴텀급)로 발탁된 간판복서 임병진(대우)을 한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일방적으로 난타 대표팀에 복귀하며 전성기적 기량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최종선발전에서 또다시 임병진을 군말 없는 판정으로 제압, 본선에 진출해 1977년 아시아선수권대회(자카르타)에서 월등한 기량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대회 2연패에 성공하면서 최우수복서로 선정됐다.   

 

박수칠 때 은퇴를 선언하며 피날레를 장식한 그의 일대기는 마치 한편의 인생극장을 보듯이 드라마틱하다. 이런 그를 향해 당시 라이트미들급 국가대표 박일천(49년, 전매청)은 ‘누가 뭐래도 당시 최고의 복서는 단연 유종만’이라고 말하며 '그의 링 제너럴십(ring general ship)과 복싱 스킬은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곽귀근 경북체고 교사도 ‘깊은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 대하무성(大河無聲)같은 스타일의 선배’라 그를 평했다. 40년 동안 복싱을 담당한 대학 교수로써 무탈하게 지도자생활을 마감하고 편안한 여정을 준비하시는 유종만 교수께 그간의 노고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조영섭

문화저널21 복싱전문기자

 

현) 서울복싱연맹 부회장

현)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전) 82년 로마월드컵 대표선발전 플라이급 우승

최승혜 19/09/09 [11:37] 수정 삭제  
  복싱 이야기 재밌습니다, 글도 자주 쓰시고, 복싱장에서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시는 관장님, 항상 감사합니다^^
베냐민 19/09/09 [13:19] 수정 삭제  
  오늘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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