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챔프 ①] WBA 밴텀급, WBC수퍼플라이급 챔피언 문성길

박명섭 기자 | 기사입력 2019/08/27 [16:35]

[대한민국 챔프 ①] WBA 밴텀급, WBC수퍼플라이급 챔피언 문성길

박명섭 기자 | 입력 : 2019/08/27 [16:35]
  • 대학 입학과 동시에 국제대회 은메달…국가대표 발탁
  • 간장에 밥비벼먹으며 운동하다 들어간 태릉선수촌 잊지못해
  •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

 

1961년 전남 영암출신 전 WBA, WBC 세계챔피언 문성길은 주먹도 주먹이지만 석사출신(동국대 대학원, 경영학) 복서로 유명하다.

 

문성길은 원래 육상 체육특기생으로 목포 덕인고에 입학하게 됐지만 78년 12월 23일 목포의 한 권투체육관에 입관하면서 육상을 뒤로하고 권투에 몰입했다. 

 

“육상선수들은 팔이 가늘다. 그래야 피로가 덜 오니까 마라톤 같은 것도 잘 할 수 있는데 나는 팔이 굵다보니까 달리면서 피로가 많이 쌓여서 마라톤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권투를 하게 됐는데, 처음 체육관에 가니까 몸도 느리고, 유연성도 없다면서 다들 비관적인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방이 있었고, 마라톤을 했기 때문에 폐활량도 좋았다. "당시 체육관에서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 중 나보다 1~2년 더 일찍부터 운동한 사람도 주먹이 세고 기량이 좋은 나와 스파링하면 나가떨어졌다.”

 

고교시절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던 그는 "고등학교 때 일곱 번 전국대회에 출전했는데 여섯 번이나 3등을 했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은 100퍼센트 내기 이긴 시합이었다고 생각 한다. 모두 3대2 판정이었는데, 심판들의 판정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회상했다. 

 

▲ 문성길 전 WBA밴텀급, WBC 수퍼플라이급 챔피언  © 박명섭 기자


당시 문성길은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야 한국체대 입학이 가능한데, 동메달만 있으니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목포대학에 입학하게 된 그는 입학식도 하기 전 국제대회인 킹스컵 대회에 출전했다. 그런데 거기서 은메달을 따 왔다. 전국대회 나가서는 매번 동메달만 따다가 외국에서 치러진 국제대회에서 은메달을 따오니, 학교에서 그가 납입한 입학금을 돌려줬고, 그 해 문성길은 태극마크를 달았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문성길은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출전 훈련을 위해 7월 태릉선수촌에 입촌을 하게 된다. 문성길은 “그곳에 가 보니, 내가 운동선수로 성공하려면 국가대표 자리를 뺏기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선 먹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잘나왔다. 자취하면서 간장에 밥 비벼먹고 운동하다가, 그 많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들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비교가 안 되는 것으로, 열심히 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선수촌에서 아침운동을 할 때도 악착같았다. 당시 태릉선수촌의 권투선수들은 400미터 트랙을 12~15바퀴 도는데 못 뛰는 선수들의 경우는 문성길이 두 바퀴 정도 제쳐두고 항상 앞서서 뛰었다. 잘 뛰는 선수도 반 바퀴는 제쳐두고 뛸 정도로 그는 열심히 뛰었다. 그는 “토요일마다 전 선수가 불암산을 뛰어 올라가는데 앞서가던 선수들이 산 중턱쯤 되면 다 나에게 추월당했다”며 당시의 무용담을 전했다. 

 

문성길은 그 해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나가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귀국 후 청와대 초청까지 받았다. “귀국하니까 청와대에서 메달리스트들을 초청했다. 당시 금메달 300만원, 은메달 200만원, 동메달 100만원씩 받았다.”

 

그는 같은 해 11월 미국 리노에서 열린 제4회 세계복싱선수권대회 밴텀급에서 대한민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86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건 그는 88 올림픽 금메달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시련이 찾아온다. 

 

그는 오랜 라이벌이었던 허영모와의 라이벌전 이후 88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이 불투명해지자 프로로 전향하게 됐고, 그에 대한 후폭풍도 만만찮았다.

 

▲ 문성길 전 세계챔피언(사진 중앙)이 문성길복싱클럽을 방문한 지인들과 기념촬영 하고 있다. © 박명섭 기자

 

특례보충역 조건 못지켜 아이 둘, 나이 서른에 군 입대

WBA 밴텀급 2차방어 성공, WBC수퍼플라이급 9차방어 성공

 

프로로 전향한 문성길은, 일곱 번째 경기에서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지만 태국에서 가진 3차 방어전에 패하면서 롱런에는 실패했다. 그러다 1990년 체급을 낮춰 세계복싱평의회(WBC) 수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도전해 두 번째 경기에서 챔피언 벨트를 획득했으나 느닷없는 군대 입영 통지서를 받게 됐다.   

 

1982년 국가대표가 돼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86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건 그이지만 1982년 11월 아시안게임 후 취득한 '병역 특례보충역 자격을 위반해 군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5년간 해당분야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의무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8개월 전 프로로 전향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2개나 땄는데도 영장이 나와 나이 서른에 군대를 갔다. 당시 애도 둘 있었다. 그런 경우는 면제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영장이)나왔고, 지금은 프로선수들도 면제되는데 그 부분이 아주 억울하다”고 말했다. 

 

1990년 WBC 수퍼플라이급챔피언이 된 후 입대를 한 그는 방어전을 치러야 했기에 논산훈련소로부터 장기 휴가를 받아 케냐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스페인으로 날아가 방어전을 치렀다. 그런 경우는 전무후무 한 일이다. 그는 “스페인 가서 방어전을 치르고 와서 남은 훈련기간 다 채우고 자대배치가 됐다. 당시 국군체육부대가 아닌 경기도의 예비군부대에서 근무했는데, 10년 아래의 아이들에게 경례 부치고 군 생활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93년 WBC 수퍼플라이급 10차 방어전에서 호세 루이스 부에노에 판정패 후 은퇴한 그는 “사실 챔피언 벨트를 내 준 10차 방어전은 내가 이긴 경기라고 생각 한다. 포항에서 했는데, 다운까지 시키면서 멕시코 선수를 압도했던 경긴데 결과는 3대2 판정패였다. 일본 복싱관계자들의 농간도 있었던 것 같고, 프로모터의 비즈니스 부분에도 아쉬움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은퇴 후 그는 사회에서 알게 된 지인을 통해 철판볶음밥집을 세군데 운영했다. 이후에도 최근까지 음식점 운영을 주로 해 왔으며, 현재 문성길이란 이름의 체육관이 여러 곳 있지만, 강동구 성내동 소재 문성길복싱클럽(관장 조영섭)만 가끔씩 방문하는데, 직접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프로복싱이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지적에 대해 “요즘 프로복싱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정신력”이라며, “요즘 애들은 우리가 배울 때처럼, 또 내가 초창기에 가르칠 때의 아이들처럼 배우려고 기를 쓰고 하지 않는다. 또 스파링 한번 하다가 맞으면 그다음엔 안나와버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처럼 프로복싱의 전성기가 돌아올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내가 한참 배우던 그 때는 쌍코피로 옷이 흠뻑 젖어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했다. 현재 일본 같은 경우는 프로모션이 아직 살아있기에 유지가 되는 것 같고,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하지만, 가치관이 많이 바뀐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예전과 같은 챔피언들이 나오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자녀들 모두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 하고 있으니까 큰 걱정은 없다”는 문성길은 “현재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여기 저기 좋은 일 생기면 함께 할 것이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고...”라며 기대섞인 말을 전했다.

 

문화저널21 박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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