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단독] 노무현 청탁전화의 전말

박영주 기자 | 기사입력 2019/06/10 [17:46]

[그날][단독] 노무현 청탁전화의 전말

박영주 기자 | 입력 : 2019/06/10 [17:46]

2002년 12월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이 진행 중이던 2002년 4월11일 당시, 노무현 후보의 ‘청탁(민원)전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후일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 추락과 함께 후단협 결성, 정몽준 돌풍 등 거센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왔다. 동시에 지금까지 해내지 못하는 ‘검찰개혁’이라는 숙제를 고스란히 남겼다. 

 

지금 국회에서 발목이 잡혀있는 공수처법(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표였지만 청탁전화가 결국 발목을 잡아 이뤄지지 못했다. 

 

도대체 그 청탁전화가 어떤 것이었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에서 “이쯤가면 막하자는거지요?”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는지, 발설당사자인 이병기 충주지검장(당시 부산 동부지청장)이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는지. 

 

오랜시간이 지나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개혁’을 골자로 한 공수처법의 필요성이 대두된 지금. 검찰이 기를 쓰고 공격했던 노무현 청탁전화의 전말과 후폭풍, 그리고 정권과 검찰의 오랜 갈등의 역사를 꺼내본다.

 


노무현의 청탁전화 사건, 확대해석이 낳은 괴물  

내용도 청탁도 없었던 전화는 누가 문제화 시켰나

 

2002년 4월 11일 15시 전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이던 노무현 후보는 이병기 부산지검 동부지청장에게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당시 통화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前검찰 고위관계자는 "한 민원인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니 만나서 이야기나 한번 들어달라(노무현) / 알겠다(이병기)"라는 1~2분 간의 짧은 통화였다고 회상했다. 통화 당시 노무현 후보는 전남 순천 지구당 순방 중이었다.

 

노 후보에게 직접 청탁을 한 부산 해운대·기장을구 이모 지구당 위원장은 다음날 직접 이병기 지청장을 방문해 “본인(단란주점을 운영하는 한모씨)이 억울하다고 하니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선처해 달라”고 하고 이병기 지청장은 “법대로 할 것이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답했다. 

 

이후 이모 지구당 위원장이 다시 한번 이병기 지청장에게 전화해 문의했으나 “담당 검사가 알아서 결정할 것이고, 지청장인 내가 개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이후 이모 지구당 위원장은 사건에서 손을 뗀다. 이것이 ‘청탁전화’의 전말과 이후 흐름도의 전부다.

 

사실 노무현 후보가 전화한 당일 저녁 이모 지구당위원장의 발설 등으로 언론 및 각 정보사이드에서는 이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당시 새천년민주당이 노무현 후보와 이인제 후보가 혈전 중이었기 때문에 이 내용은 후보결정 때(2002년 4월27일)까지 보안에 부치기로 했다. 

 

▲노무현재단이 2013년 추모4주기때 공개한 미공개사진 속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제공=노무현재단) 

 


이병기 지청장의 ‘단순확인’…돌연 정치적 후폭풍으로

검찰총장의 지역구 물려받기 발언, 노무현 대통령의 불신 초래

'평검사와의 대화' 대통령을 끌어들인 함정

갈등으로만 끝나버린 공수처법의 미완성…지금까지 이어져 

 

노무현 후보가 전화할 당시는 노풍(盧風)이 본격적으로 불어오면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이인제 후보가 혈전을 벌이는 중대한 시점이었다. 특히 이인제 후보가 김대중 대통령까지 공격했고, 박지원을 노풍의 기획자라면서 ‘중대결심을 할 수 있다’라고 발언하는 등 일촉측발의 상황이 연출됐다. 실제로 이인제 후보는 4월17일 후보에서 전격 사퇴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으로 언론 및 각 정보사이드에서는 노무현 후보의 청탁전화에 대해 ‘보안’을 유지했으며, 비중 있는 인사가 이병기 지청장에게 “언론에서 취재하더라도 NCND(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하면 기사를 쓸 수 없다. 확인해 주지 말라”고 간곡한 당부까지 했었다.

 

이후 2002년 4월27일 서울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선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결정됐고, 후보 결정 이후부터 정보지에 2002년 4월11일 노무현 후보의 ‘청탁전화’ 사건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사의 취재 움직임이 감지되고, 주간동아에서 특집을 낼 것이라는 소문 속에서 다시 한번 주요 인사는 이병기 지청장에게 NCND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가운데 주간동아 정치부 팀이 2002년 5월2일경 확인요청을 했다.

 

이때 이병기 지청장은 “전화를 한 것은 사실이나 일반적 수준의 전화이며, 압력을 느끼지는 않았다”는 취지로 청탁전화에 대해 확인을 해주고 말았다. 단순 확인이었지만 초래한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확인을 해줄 당시 이병기 지청장은 내일신문에서 신승남 (전)총장 동생에게 1000만을 받았다는 기사 등재 등으로 입지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NCND가 지켜지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이병기 지청장의 확인으로 기사화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5월5일 15시경 부산일보 정치부 기자가 노무현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청탁전화’의 전말 및 심경 등을 문의했다. 

 

그러자 노 후보는 다짜고짜 “아이고 기자 동지 무조건 잘못했다. 먼저 부산일보에서 살살 때려 달라. 무조건 잘못했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각 정보관계자들은 ‘참 솔직한 사람이다’라면서 웃음꽃을 띄우기도 했다.

 

부산일보 기사가 인터넷에서 먼저 나간 후 2002년 5월 6∼7일 동아‧국민‧한국경제 등을 통해 청탁전화 사건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됐고, 예상했던대로 ‘청탁전화’ 사건은 노무현 후보의 사퇴요구로 이어지며 거대한 후폭풍을 불러왔다. 

 

그 결과, 4월27일 서울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된 직후 56%까지 올랐던 지지율은 청탁전화 및 김영삼 대통령 방문과 김영삼 시계 자랑 등으로 5월20일경 28%까지 추락했다. 

 

이후 노무현 후보사퇴를 위한 후단협이 결성되고 월드컵 열기를 바탕으로 정몽준 돌풍까지 일면서 노무현 후보는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이는 모두 이병기 지청장의 ‘청탁전화’ 확인이 불러온 결과였다.

 

청탁전화 확인은 검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갈등에 불을 지핀 계기라고 할 순 있다. 하지만 16대 대선 전까지는 검찰과 정권의 갈등은 크게 가시화되진 않았다. 

 

그러던 중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2월 초순경 검찰과 정권의 사이를 크게 벌려놓는, 약간의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이명재 검찰총장이 서울지검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으로 퇴임하고 11월11일 김각영 총장이 취임한 이후, 12월 초순경 김 총장은 몇몇 기자에게 “고향선배인 김용환 의원이 지역구(충남 보령)를 물려준다고 했으나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노무현 후보 측의 귀에 흘러들어갔고, 노 후보는 “검찰총장이 한나라당 끄나풀 아니냐. 어떻게 그런 말들이…그냥두지 않겠다”며 분노를 표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쌓인 분노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지 12일 만인 2003년 3월9일 노무현 대통령이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현 검찰 상충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검찰과 대통령의 토론 분위기는 이미 짜여진 함정에 대통령이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자서전 운명에서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라고 표현했을까. 

 

김영종 당시 수원지검 검사는 “대통령께서는 취임 전에 부산 동부지청장에게 청탁전화를 하신 적이 있다. 왜 검찰에 전화했나.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지 않으시냐”고 캐물었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쯤 가면 막하자는 거죠”라는 말과 함께 “청탁전화가 아니었다”고 공식해명했다.

 

토론 이후 9일 김각영 총장은 “인사권으로 검찰권을 통제하겠다는 새 정부의 의지가 확인됐다”며 사표를 냈다. 동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로 공격적인 질문을 쏟아냈던 기자들을 치하하며 “후배들이 대통령과의 대화에 참석해 기개 있게 검찰개혁을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선배로서 한없이 자랑스러웠다”고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청와대는 사표를 다음날 바로 수리해 김각영 검찰총장을 퇴진시켜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김각영 검찰총장을 축출시킨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후, 3월21일자 검사장급 이상 고위인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청탁전화’를 확인(발설)한 이병기 부산동부지청장을 검사장으로 승진해 청주지검장으로 보임시켰다. 

 

당초에는 이병기 지청장의 승진탈락이 예상됐으나 너무 큰 파문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보복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더더욱 승진을 결정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당사자인 이병기 지청장은 16대 대선 내내 고심을 지속하다가 노무현 후보 당선 후 심리적 안정을 가누지 못하면서 불안과 초조의 나날들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면있는 인사들과 통화시 정권(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불안감을 나타내면서 수없이 질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3월21일 승진해 청주지검장으로 보임되자, 그는 마치 실점을 만회하려는 듯 과도한 열정으로 잠을 설쳐가며 직무에 열중했다. 그러다 밀려오는 고통을 호소하면서 가슴을 움켜잡고 몸부림치다 2003년 8월1일 고려대 병원에서 향년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병기 검사장의 생의 마지막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들의 전언에 따르면 “청탁전화 확인파문이 너무나 커서 본인도 놀란 상황에서 노무현 후보 당선으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청주지검장 부임 후 열심히 노력하려고 했으나 청탁전화 확인의 장벽을 넘지 못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사망했다”고 그의 생의 말년을 간결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청탁전화는 이병기 지청장의 확인 파문, 검사와의 대화, 송광수 총장의 ‘내목을 치라’는 발언 논란, 김종빈 총장의 사표 등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정권 내내 갈등을 지속하게 만들었다.

 

청탁전화 자체는 간단하고 별 내용이 없었지만 여기에 많은 알력이 작용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하려던 검찰개혁에 있어 끝끝내 발목을 잡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곁에서 민정수석으로 지내던 문재인 대통령이 또다시 검찰개혁을 계획하고 있다. 

 

청탁전화로 시작된 파장이 결국 검경수사권 조정 실패로 이어지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다 지켜보았을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청와대 발 공수처법 추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리고 검찰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무섭도록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김학의 수사나 문무일 검찰총장의 항명 등을 보면 검찰개혁의 ‘골든타임’이 또다시 검찰 조직에 의해 지나가고 있음이 여실히 보여진다. 여기에는 왜 자유한국당이 패스트트랙 통과를 반대하며 ‘공수처법’ 저지를 위해 움직이는지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20여년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청탁전화 사건’은 지금의 공수처법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청탁전화의 전말과 후폭풍을 통해 그 속의 의중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문화저널21 박영주, 홍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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