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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産室) ①

수모 겪는 탑골공원…‘역사적 재정립’ 이뤄지길

강인 | 기사입력 2019/01/04 [11:57]

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産室) ①

수모 겪는 탑골공원…‘역사적 재정립’ 이뤄지길

강인 | 입력 : 2019/01/04 [11:57]

▲ 강 인

1904년에 조성된 탑골공원(사적354호)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名所)다. 이곳은 서울의 가장 중심지인 종로3가에 위치한 1만5000㎡의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등 소중한 유형 문화재와 여러 무형의 문화유산이 담겨있는 보고(寶庫)다.

 

이곳은 본래 고려시대에 세운 ‘흥복사(興福寺)’를 조선시대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했고 이후 연산군(燕山君)에 의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으로, 조선후기 한때는 지식인이 모이던 장소로, 대한제국시대에는 고종황제의 명(命)으로 지정된 최초의 서양식 도심공원으로, 일제강점기인 기미년(1919년)에는 3·1운동의 발상지(發祥地)로 숱한 변천을 거듭했다. 

 

해방 후에도 탑골공원은 각종 변화들이 끊이지 않았다. 1956년에는 공원 안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4·19 혁명 이후 군중들에 의해 철거돼 종로거리를 끌려 다니는 일이 벌어졌으며,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3·1운동 기념탑을 세우고 ‘삼일문’이라는 자신의 친필 현판을 남문(南門) 출입구 상단에 부착했으나 기념탑은 1979년 신군부에 의해, 현판은 2001년 ‘한국민족정기소생회’라는 단체에 의해 새벽녘에 기습적으로 철거됐다.

 

그 이후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탑골공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면서 이곳은 노년층의 휴식 전유공간이 됐다. 오늘날에는 일명 ‘박카스아줌마’가 활보하는 노인퇴폐의 온상으로서 젊은이들과 수준있는 시민은 물론 인근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까지도 기피하는 부끄러운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귀중한 사적지인 탑골공원은 수난(受難)과 오욕(汚辱)을 동반한 역사적 변천과,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빛을 잃은 채 홀대받는 ‘잡(雜)골’로 변모됐다.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産室) 

숱한 변천을 거듭한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이라는 또다른 역사적 가치가 있다. 우리는 탑골공원의 역사적 기억을 3·1운동의 발상지로만 국한시키고 있고 이곳의 성격을 ‘독립유적지’로 분류하고 있지만, 이는 탑골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간과(看過)하는데서 오는 관념적 오류다.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전래(傳來)된 것은 1892년 고종황제를 통한 대한제국 군악대 설치령에 의해서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은 러시아 군대파병 요청을 위해 러시아로 ‘충무공 민영환’ 특사 일행을 파견했는데, 당시 민영환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해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를 보고 귀국한 이후 고종에게 군악대 창설을 제안해 이를 허락받았다. 

 

이로 인해 1900년 12월19일 ‘칙령 제59호’에 의거해 역사적인 대한제국 군악대가 탄생됐다. 이는 대한민국 땅에 최초로 서양음악의 씨앗을 심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잊을 수 없는 은인 ‘프란츠 에케르트’

고종은 군악대를 이끌어갈 인물로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를 초빙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외무대신 박제순이 서울에 주재하던 독일영사 ‘하인리히 바이페르트(Heinrich Weipert)’를 찾아가 요청했다. 요청을 수락한 에케르트는 1901년 2월19일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도착해 같은해 4월5일 군악대 교사로 3년간 고용계약을 맺었다.

 

▲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를 작곡하고 지휘한 독일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

프로이센(Preussen) 왕립 악단장을 지낸 에케르트는 앞서 독일 해군 군악대 지휘자로 근무하던 시절인 1879년, 일본에 파견돼 서양음악을 전해준 바 있다. 그는 1880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작곡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프란츠 에케르트는 고종의 초청에 의해 가족과 함께 내한하면서 50인조의 군악대가 사용할 각종 관악기, 타악기들을 가지고 왔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악대 창설은 물론 한국인에게 서양음악을 전수함으로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1902년에는 고종의 요청으로 최초의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07년 군대해산에 따라 군악대도 해산됐지만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민간 음악학교를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양악대를 만들어 지속적인 공연활동을 전개했다. 뿐만아니라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도 한국음악계를 위해 헌신했다. 만일 프란츠 에케르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음악계가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룩하고 음악을 통해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을까? 

 

국내 최초 음악학교 개설…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

고종은 황실군악대 육성을 위해 탑골공원 서북쪽 부지에 별도의 건물을 짓도록 명(命)하고 그곳에서 에케르트로 하여금 서양음악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교였다. 에케르트는 여기서 27명의 군악대원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맹훈련 끝에 4개월 남짓의 연습으로 외국악기를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1907년 8월1일, 군악대는 해산되었지만 같은해 9월1일 악사 101명의 황실음악대로 재조직돼 궁내부 장례원에 편입됐다.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韓日合邦)에 의해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면서 장례원 소속 음악대는 이왕직(李王職)악대로 부속됐으나 고종이 사망한 1919년 9월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같은해 10월, 부지휘자 격에 있었던 ‘백우용’을 중심으로 ‘경성양악대(京城洋樂隊)’라는 이름의 민간단체로 재탄생돼 1920년 6월1일부터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매주 한번씩 저녁시간에 탑골공원에서 열었다. 국내 최초의 민간오케스트라인 경성양악대는 ‘서울시립교향악단(Seoul Philharmonic Orchestra)’의 모체(母體)다.

 

▲ 1903년 바즐라프가 찍은 팔각정 공사 현장 모습.

  

최초의 음향공학(音響工學)에 의해 건축된 야외무대 ‘팔각정’

탑골공원 안의 ‘팔각정’ 역시 연주무대로서 음악적 가치가 높은 장소다. 마이크나 확성기가 없었던 시기에 육성이나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음향판 역할을 하는 지붕을 통해 팔방향으로 골고루 퍼져나가도록 건축된 무대가 탑골공원의 팔각정이다. 

 

1903년 탑골공원을 황실군악대의 상설공연장으로 결정한 후 ‘팔각정’을 연주무대로 지을 것을 황실로부터 제안 받은 당시 음향공학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건축가 심의석은 그의 건축경험을 토대로 탑골공원 야외공연장에 걸맞은 건축양식으로 팔각정을 설계‧건축했다. 

 

음향효과란 단순히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얼마나 디테일)이 살아있는 양질의 울림을 전해주느냐가 관건이다. 심의석은 음향의 절대적인 효과는 팔(八)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음파에 있다는데 대한 연구에 깊이 몰입해 건물을 지어냈다.

 

▲ 탑골공원 내 팔각정의 지붕모습. (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그는 팔각정 지붕의 음향효과를 위한 목재로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사용했다. 8면의 한면마다 6개의 단단한 소나무 기둥으로 배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양질의 울림을 지닌 단풍나무를 배치한 것은 음을 반사해내는 음향판으로 고안한 것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노의 향판이나, 현악기를 제작할 때, 주로 울림이 좋은 단풍나무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1902년 고종의 요청으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는 1906년 10월6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라고 시작되는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가 대한제국 황실군악대의 연주에 의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몇해 지나지 않아 1910년 한일합방으로 금지곡이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자국(自國)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곡을 계속해서 애국가로 불렀다. 

 

팔각정은 할 일없는 노인들이 앉아 장기나 두며 소일(消日)하는 ‘정자’가 아니다. 100여 년 전 음향공학을 도입해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음악무대로서, 민족슬기의 소중한 과학적 산물로 재조명돼야 할 것이다.

 

강 인

문화예술평론가

한국경제문화연구원 문화예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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