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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세계관과 상대주의

손봉호 | 기사입력 2018/12/03 [08:45]

[손봉호의 시대읽기] 세계관과 상대주의

손봉호 | 입력 : 2018/12/03 [08:45]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세계관을 쉽게 설명할 때 자주 이용하는 비유가 안경이다. 빨간 렌즈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빨갛게 보이고 초록렌즈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초록이다. 모든 사람은 다 이런저런 색깔의 안경을 끼고 있는데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바로 기독교적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비유란 항상 약점을 동반하는데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되지만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 

 

당장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상대주의다. 기독교란 안경도 수많은 안경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도 안경 없이 세상을 볼 수 없다면 기독교란 안경을 껴야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사실 세계관이란 이념이 처음으로 철학적 논의에 등장한 것은 상대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16~18세기 유럽의 지성계를 지배했던 계몽주의 사상은 모든 인간은 이성이 있고 그 이성의 능력을 통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세계를 보는 눈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이성이라고 믿었다. 기독교적 안경이나 불교적 안경 같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만약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폭로되고 제거되어야 할 오류라고 믿었다. 

 

이런 확신이 19세기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성은 절대적이 아니라 의지나 감정에 의해 설정된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니체 같은 철학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놀랍게도 니체는 종교개혁 때 루터가 “이성은 창녀”라고 한 말을 반복했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이 숭상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했지만, 니체는 계몽주의가 신봉했던 이성을 조롱한 것이다.

 

상대주의적 사고방식이 조금씩 머리를 들기 시작했고, 거기서 세계관(Weltanschauung)이란 용어가 언어학과 철학 논의에서 점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 혹은 각 문화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종합적으로 형성한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상대주의적 관점은 20세기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고 확산되었다. 철학사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그것을 대변하고 사회과학에서는 문화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그것을 반영한다. 이누이트(Inuit)족 문화를 연구한 보아스(F. Boas)의 “이누이트 문화는 서양 문화보다 뒤떨어진 문화가 아니라 서양 문화와는 다른 문화”란 주장은 오늘날의 문화다원주의와 문화상대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모든 문화는 동일 선상에서 발전하되 합리성에 뛰어난 서양 문화가 가장 앞서고 아시아, 아프리카 문화가 그 뒤를 따른다는 서양 문화 우월주의(ethnocentrism)가 지배했는데, 보아스가 그런 편견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문화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이제 전 세계의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유럽을 지배했던 인본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카이퍼 (A. Kuyper)와 도여베르트 (H. Dooyeweerd)도 그런 상대주의 기류와 전혀 무관할 수 없었다. 기독교, 불교 등만 종교가 아니라 인본주의를 비롯한 모든 ‘주의(-isms)’에는 종교적 근본동기(ground motive)가 숨어서 작용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 역시 상대주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펼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그런 사상적 흐름의 산물임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상대주의에 동의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적 세계관도 역시 서로 다른 여러 세계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인정해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무너진다. 우리는 성경적 세계관만이 옳은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왜 옳은가를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한다는 것은 모든 세계관이 다 동의하는 제3의 중립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계몽주의가 주장하다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중립적이고 절대적인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하고 믿을 권리가 있으며 우리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하고 명시적으로 내놓을 것은 없고,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중요한 목적도 아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이며, 무엇보다도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난 잘못된 세계관, 특히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공동체가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 비기독교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계제라 할 수 있다.

 

한국적 세계관은 내세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차세중심적이고, 이런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타락으로 이끈다. 자연과학이 만들어 놓은 현대인의 세계관도 철저히 차세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대체로 유물론적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주로 이런 것을 함께 발견하고 같이 고치며 조금이라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고 활동하는 경건 훈련이자 한국 교회 개혁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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