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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비판적 소비

손봉호 | 기사입력 2018/10/08 [08:27]

[손봉호의 시대읽기] 비판적 소비

손봉호 | 입력 : 2018/10/08 [08:27]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젊은 교수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제조사의 전자제품을 쓴다. 값이 싸고 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유명 제품들의 제조회사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들의 도덕성을 판단할 수는 없으나 그의 그런 소비행태를 높이 평가한다. 만약 우리 사회의 소비자 상당수가 단순히 질 좋고 값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자와 생산 과정의 도덕성을 고려해서 상품을 구매한다면 불량품도 줄어들 것이고 사회 전체의 도덕성도 높아질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상당할 정도로 자급자족했다. 스스로 농사지어 먹었고 길쌈해서 입었다. 물론 시장도 있었고 매매도 이뤄졌으나 지금에 비하면 그런 매매가 차지하는 정도와 중요성은 미미했다. 그러나 사회가 다양화되고 분업이 확대된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품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생산한 것을 소비한다.

 

따라서 소비 활동에서 다른 사람이 중요해지고 이해관계가 생겨난다. 세계화가 진척되어서 그 다른 사람이 누군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비를 통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성립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자급자족이 많이 이뤄졌을 때나 가족 혹은 잘 아는 사람이 쓸 물품을 생산할 때는 속이는 경우가 별로 없었고, 따라서 상도덕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에도 생산자들이 정직하고 정의롭게 상품을 제조하고 유통한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고, 실제로 그런 생산자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가능한 한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사려 할 것이므로 정직한 생산자는 그런 요구에 부응해 가능한 한 질 좋은 상품을 정직하게 생산해 가능한 한 값싸게 판매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면 스미스(Adam Smith)가 말한 대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질 좋은 물건이 값싸게 시장에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돈에 찌든 오늘의 세계에서, 특히 대형 투자와 큰 이익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사람의 이성과 양심이 항상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눈에 보이지 않고, 조금만 속이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는데도 자발적으로 정직해지기란 그렇게 쉽지는 않다. 비도덕적이면 손해를 본다는 두려움이 있어야 정직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는 엄격한 법과 공정한 법 집행이 소비자 보호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법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비판적인 소비문화다. 상품 생산자에게는 법보다 소비자의 반응이 더 무섭고 더 큰 압력이 된다. 소비자가 외면하면 생산자는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비자는 우선 자기에게 필요한지, 질이 좋고 값이 싼지만 따진다.

 

그리고 생산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생산자들이 생산품의 원료와 생산 과정의 도덕성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사회와 소비자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이 없지 않다. 오직 자기 편의와 이익만 챙기는 무책임한 소비자가 있기에 비도덕적인 생산이 이뤄지는 것이다. 무책임한 소비는 무책임한 생산을 장려하고, 그 결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소비자가 해를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에게 당장 필요하고 값이 싸다는 이유로 상품을 구매할 것이 아니라 그 재료와 물건 혹은 서비스가 사람과 환경에 해롭지 않은지, 제조 과정에서 법을 어기거나 근로자를 착취하고 다른 업체에 불공정한 손해를 끼치지 않았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개개인이 상품이나 서비스 하나하나에 다 그렇게 할 수는 없으므로 소비자단체나 소비자보호기관의 조사 발표와 언론 보도에 관심을 기울이면 된다.

 

물론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입을 것이 없이 떠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면 앞에 언급한 젊은 교수처럼 비판적인 소비를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만 불량상품과 서비스가 사라지고 비도덕적인 경제활동이 제재를 받을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소비자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한때 미국과 유럽에서는 한 의류 브랜드가 방글라데시의 생산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했다는 이유로 불매운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거대 기업의 노동력 착취 방지와 방글라데시의 인권 개선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선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정무역 운동도 약한 나라에 대한 다국적 기업들의 경제적 착취에 어느 정도 제재가 될 것이다. 이처럼 의식이 깨인 시민들이 뜻과 힘을 모아 비판적 소비 활동을 펼치면 경제 활동이 정의로워지고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되는 데 크게 공헌할 수 있다. 책임 있는 모든 소비는 공익에 이바지한다. 

 

불편한 전자제품을 사용하고, 값싼 옷을 사지 않으며, 맛있는 고급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절제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불편과 손해 없이 세상을 건강하고 정의롭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불편과 손해는 그 결과로 생겨나는 이익에 비하면 큰 희생은 아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정도의 작은 희생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소금이 되는 의무와 특권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비판적 소비를 실천하면 사회의 도덕성이 한결 높아질 수 있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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