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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4차 산업혁명, 경계하며 지켜보자

손봉호 | 기사입력 2018/08/27 [09:02]

[손봉호의 시대읽기] 4차 산업혁명, 경계하며 지켜보자

손봉호 | 입력 : 2018/08/27 [09:02]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주장이 있다. 면죄부의 오류를 지적한 루터의 95개 조항은 당시에 막 개발된 인쇄술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천주교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개혁의 추진력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도 인쇄술이 없었다면 그처럼 많이 제작되고 빨리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쇄술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물론 단순히 그 때문에 개혁교회가 새로운 기술에 호의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모든 지적 활동의 자유를 제한했던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무너진 것이 과학과 과학기술을 포함한 모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신장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의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종교개혁 덕에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Beruf)”이란 루터의 주장과 노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칼뱅의 가르침, 그리고 칼뱅이 빌린 돈에 대해서 이자를 허용한 것은 상업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거기다가 칼뱅은 절제를 강조한 자본의 축척을 가능하게 했다. 제네바 시에서 보석 매매를 금지하여 보석공들이 시계 제작으로 직업을 바꾼 것이 오늘날 스위스 시계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어쨌든 종교개혁이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에 엄청나게 큰 공헌을 한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소프트파워를 통한 공장과 제품의 지능화”가 그 특징이라고 한다.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 2차 산업혁명은 전기 발명,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 발명으로 일어났는데,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개발로 가능해졌다 한다. 모두 새로 개발된 기술 때문에 산업의 형태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게일런(A. Gehlen)은 원시 사회의 마술(magic)은 오늘의 과학기술(technology)에 해당된다고 했다. 마술이란 제물을 바치고, 춤을 추고, 주문을 읊고, 노래를 부르는 등 인위적인 수단으로 인간을 위협하고 압도하는 자연 혹은 초자연적 힘을 제어하고, 나아가 그 힘을 인간의 삶에 유익하도록 유도하려는 시도였다. 홍수, 태풍, 지진, 전염병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빌고, 풍년이 들고, 가축이 새끼를 많이 낳도록 기원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기술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연의 힘을 제어하여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거나 삶을 더욱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는 데 이용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마술이든 과학기술이든 모든 기술은 ‘힘’을 통제하고 얻기 위한 수단이다.  

 

짐승과 달리 사람은 자연에 대처하고 자연의 힘을 이용하기 위하여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제조하는 인간”(homo faber)이다. 요즘은 짐승들도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작은 새가 뾰족한 돌로 타조 알을 깨기도 하고 원숭이가 막대기를 이용하여 바나나를 따기도 한다. 그러나 도구를 움직이게 하는 힘 자체를 제조하는 기술은 짐승에게 없으며 옛날 사람에게도 없었다.

 

풍차, 돛단배, 물레방아도 어느 정도 스스로 움직이지만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자연에 주어진 그대로이지 인공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산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런데 증기기관을 움직이게 하는 증기와 전동기를 움직이게 하는 전기는 자연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술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물리적 힘을 이용하는 지능 자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이 생겨나서 4차 산업혁명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구글의 커즈와일(R. Kurzweil)은 2014년에 기술이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하여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서 컴퓨터 자체가 인간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개량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기계는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고 말 것이다. 개인의 모든 지능을 데이터로 만들어 컴퓨터에 저장하면 육체가 없는 지능도 가능하다는 주장은 기술을 통한 영생을 꿈꾸게 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다. 컴퓨터학 권위자인 지런터(David Gelernter) 예일대 교수가 그건 말도 안 된다(nonsense)고 주장해서 좀 위로가 된다.  

 

1차 산업혁명부터는 과학기술이 과거처럼 주로 자연의 변덕을 극복하고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만약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과학기술은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의약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기술이 상업적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돈이 모든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액튼이 지적한 것처럼 “모든 힘은 부패할 경향을 가지고 있고 절대적인 힘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그것은 칼뱅의 “인간의 전적 부패”교리와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개신교의 핵심 교리이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확실한 사실로 증명되었다. 거기에는 과학기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과학기술은 엄청난 물리적 힘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고 그 힘은 인류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죽을죄를 짓지 않은 무수한 생명을 앗아갔고 무수한 사람에게 잔인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핵폭탄 하나만큼 많은 생명을 앗아간 자연 재난은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마냥 좋아하고 축하할 수만은 없다. 1차 산업혁명 때의 러다이트(Luddite) 운동처럼 새로운 발전을 모두 반대할 필요는 없지만 심각하게 경계할 필요는 충분하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진 기술의 힘은 과거 어떤 것보다 큰 파괴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이뤄진다”(If anything can, it will)는 속담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특히 요즘 일어나고 있다는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능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능으로 자연을 정복할 만큼 강해졌다면, 그 지능조차 보조하고 심지어 대체까지 할 수 있는 기술은 실로 가공할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 무서운 힘이 반드시 건설적이고 결코 파괴적이지 않게 사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자동화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허용해야 할 것인가? 4차(四次)가 사차(死次)가 될 수도 있다. 

 

종교개혁이 이런 발전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면 그 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의 개신교인들은 그 발전의 결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발전을 마냥 축하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고 그 열매를 즐기는 데 급급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 발전이 꼭 필요한지, 누구에게 필요한지 따져 봐야 하고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경계의 눈으로 그 추이를 지켜보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거나 잘못된 목적에 이용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경고해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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