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시대읽기] 언어는 세계관 그릇

손봉호 | 기사입력 2018/04/09 [10:28]

[손봉호의 시대읽기] 언어는 세계관 그릇

손봉호 | 입력 : 2018/04/09 [10:28]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스위스의 철학자 테비나스(P. Thévenaz)는 “언어가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말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그 의미를 의식할 수 있어야 말이 된다. 현상학자 후설은 의식이 바로 의미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짐승도 정보를 전달한다는 주장이 있다. 꿀벌은 날갯짓으로 어떤 꽃이 어느 쪽에 얼마나 있는지를 동료 꿀벌에게 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갯짓은 본능에 의한 신호(sign)일 뿐 ‘의사’ 전달은 아니다. 자신의 몸짓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지만 언어가 없으면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생각이란 의미를 가진 의식으로 이뤄지고 언어가 있어야 의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은 곧 사람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언어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든다고 할 수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카시러(E. Cassirer)가 인간을 “상징을 가진 동물”(animal symbolicum)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언어는 상징의 대표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아담이 “이름”을 준 것은(창 2:19-20) 인간에게만 언어능력이 주어졌음을 암시한다. 명사는 언어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이다. 

 

언어는 자동차나 무궁화처럼 손으로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이나 민주주의처럼 추상적인 이념을 표현하지만 “자동차가 멋지다”, “무궁화가 아름답다”, “민주주의를 이룩해야 한다”처럼 감정과 가치관, 의무도 표현한다. 그래서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 전체를 나타낸다. 조리 있게 말하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생각이 논리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쓰기 때문이다.

 

추잡한 말을 하는 사람은 그의 인품이 추잡하기 때문이고, 아름다운 말은 아름다운 마음을 대변한다. 야고보는 말과 관계해서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고 한다. 생각이 깨끗하면 말이 깨끗할 것이요, 인품이 고상하면 고상한 말이 나올 것이다. 말조심하란 것은 입술과 혀를 조심해서 움직이란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르게 하고 인품을 훌륭하게 가꾸란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필요하다. 혼자 살면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이 없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언어는 사회적이고 인간도 사회적이다. 사회학자 미드(G. Mead)가 말한 것처럼 “나를 나로 만든 것은 사회다”(I am what the society makes me). 나를 한국인으로 만든 것은 나의 피나 피부 색깔이 아니라 한국 사회요, 한국 문화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무엇보다도 한국어를 매개로 해서 나를 한국인으로 만든다. 

 

사람의 의식은 마치 물웅덩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끗한 물이 계속 들어오면 웅덩이도 깨끗해지고 더러운 물이 많이 들어오면 웅덩이가 더러워진다. 사회의 구성원들과 계속해서 의사를 교환하는 동안 들어오는 정보와 가치관이 나의 생각과 인격을 염색하는 것이다. 사회가 논리적이고 도덕적이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논리적이고 도덕적이 된다.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낮으면 구성원들의 도덕성이 높아지기가 힘들다. 선진 사회와 후진 사회는 그렇게 해서 결정된다. 우수한 개인들이 우수한 사회를 만들고, 우수한 사회가 우수한 개인을 만들어 낸다. 

 

의시소통이 주로 언어를 통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언어는 객관적인 의미(denotation)와 더불어 그 사회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언어의 구조(syntax)는 인간 사고의 저변에 생득적으로 주어진 근본 구조일 수 있으나 언어의 의미(semantics)는 전적으로 문화적이다. 문화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만들어 낸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만들고 한국어가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한국인으로 만든다. 중국의 기독교 사상가 린유탕(林語堂)은 같은 생각을 중국어와 영어로 써 보았더니 두 개의 다른 글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래서 심지어는 “모든 번역은 왜곡이고 모든 번역가는 반역자”(All translation is corruption and all translators are traitors.)란 말까지 생겨났다. 자연과학 논문은 정확하게 번역될 수 있겠지만 인문학적인 글, 특히 시는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다. 

 

개인의 경우처럼 문화의 특성도 그 사회의 언어에 반영된다. 영어에는 명사가 풍부하고 한국어에는 형용사가 풍부한 것은 한국인이 논리적인 사고보다는 감성적인 능력이 발달되어 있음을 반영하고, 서양 어에는 험한 욕설이 주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반면에 한국인의 욕설은 주로 부모나 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들 문화에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언어는 그 사회의 거울이며 세계관의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요즘 한국어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욕설을 포함한 비속어, 야유와 냉소로 가득 찬 청소년들의 약어, 슈퍼, 스테인 등 미국인도 모르는 영어, “당선되다(뽑히게 되게 되다), “피해를 입다”(해를 입음을 입다), “시혜를 베풀다”(은혜 베풂을 베풀다)와 같이 “역전(驛前) 앞에서 축구(蹴球)차다” 식의 비논리적인 관용어, “너무 좋다”, “좋은 것 같다” 같이 따져 보면 말이 안 되는 표현들이 들끓는다. 자기가 실수를 해 놓고는 “양해의 말씀 올립니다” 하는 방송국 아나운서가 한둘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 실수를 “너그러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가관이다. 국가조차도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명절을 “설”(정월 초하루)이라 부르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은 푸대접하면서 존댓말은 과잉상태다. “할아버지에게는 애완견이 계시고”, “할머니 목이 마르시다.” 이런 상황은 바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제멋대로이며 불안정한가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잘못은 교육계 혹은 국어연구원이 앞장서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prescribers)이 있는가 하면, 언어란 생물과 같아서 인위적으로 고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므로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describers)이 있다. 영어에도 “It is me”처럼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고 “irregardless” 같이 비논리적인 단어가 사전에 들어 있다. 사람들이 이해하면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어 정화는 필요하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 판단, 느낌, 관계, 행동 등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비록 권위를 가진 개인이나 기관이 인위적으로 정화하지는 못할지라도 사회와 문화의 건전한 발전에 조금이라도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른 말, 고운 말을 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한 논리적이고 분명하게 말하며, 도덕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고 권면하고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하며 우리의 관심을 환기시킨다(약 3:2).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고(막 7:23) 그것은 주로 말을 통해서 나온다. 모든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만큼 말이 중요한 종교는 없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며 말의 종교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이 잘못된 세계관에 비판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세계관을 실어 나르는 언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고 개혁적일 수밖에 없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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